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1010년에 고려와 요나라사이 전쟁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1010년에 고려와 요나라사이 전쟁 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이 전쟁은 고려의 정치적 혼란과 요나라의 침략적 의도가 겹치면서 발생했으며, 고려의 국력과 영토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강감찬 등의 장수들의 항전과 요나라의 병참난 등으로 인해 결국 요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배경, 과정, 결과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배경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배경에는 고려와 요나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관계와 각자의 국내 정세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려와 요나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서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고려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와 기술을 수용하고, 요나라는 고려의 대장경 등을 전수받았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각자의 이익과 영향력을 위해 경쟁과 갈등도 빈번하게 겪었습니다. 고려는 발해의 유민을 보호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했으며,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나라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1010년에 발생한 강조의 정변입니다.
당시 고려의 왕은 목종이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모후인 천추태후와 그녀의 정부인 김치양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불륜 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해 그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반대한 강조는 군사를 일으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세력을 숙청했으나,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즉위시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요나라는 이를 구실로 삼아 강조의 죄를 묻는다며 고려에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요나라의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막고, 고려와의 관계를 재확인하고, 강동 6주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과정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흥화진 전투
1010년 11월, 요 성종은 40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로 진격했습니다.
요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가 격렬하게 저항하여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양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성벽을 높이고, 성내에 물을 채우고, 성외에는 불을 지르는 등 요군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요군은 여러 번의 돌격에도 불구하고 성을 뚫지 못했고, 고려군의 화살과 돌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요군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진했습니다.
통주 전투
요군은 흥화진을 빠져나와 통주로 향했습니다.
통주는 고려의 중심지였으며, 고려의 왕이 피신하기 전까지 거처하던 곳이었습니다. 고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고,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로 나갔습니다.
강조는 요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고려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했습니다.
그는 요군을 한 번에 물리치려고 했으나, 요군의 숫자와 전략에 밀려 크게 패배했습니다. 강조는 요 성종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고, 고려군은 대부분 전사하거나 도망갔습니다. 통주는 요군에게 함락되었고, 요군은 고려의 국보와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개경 전투
요군은 통주를 점령한 후,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개경은 고려의 수도였으며, 고려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려 현종은 통주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개경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개경의 방어를 강화하고, 강감찬을 국방사로 임명하고, 국내외에 긴급사신을 보내 요군의 침략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요군의 공격은 너무 강력했고, 고려군은 요군의 압박에 견디지 못했습니다.
요군은 개경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내로 쇄도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개경을 버리고 나주로 피신했습니다. 요군은 개경을 점령하고, 고려의 궁궐과 사찰, 도서관 등을 파괴하고, 대장경과 금동미륵보살입상 등의 문화재를 약탈했습니다.
나주 전투
요군은 개경을 점령한 후, 나주로 향했습니다.
나주는 고려의 남부 지방의 중심지였으며, 고려 현종이 피신한 곳이었습니다. 고려 현종은 나주에서 다시 국력을 회복하고, 요군과 맞서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그는 강감찬을 비롯한 장수들을 모아 요군의 행방을 살피고, 국내외에 다시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요군은 나주에 도착하기 전에 고려의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요군은 하공진이라는 사신을 보내 고려가 친조(親朝)한다면 침략을 멈추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요군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친조를 수락했습니다. 이로써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결과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의 피해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습니다.
고려는 수도와 중심지를 잃고, 국력과 영토를 크게 축소했습니다. 고려의 장수와 군사, 민간인 등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고려의 문화와 역사를 상징하는 대장경과 금동미륵보살입상 등의 문화재가 약탈되었습니다.
고려는 요나라에게 친조를 하고, 연례사신을 보내야 했으며, 강동 6주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에서 소극적인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요나라의 이득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요나라에게 큰 이득을 주었습니다.
요나라는 고려를 복종시키고, 영토와 재물을 확보했습니다.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았습니다. 요나라는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송나라의 반응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송나라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와 기술을 전파하고, 요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동맹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가 요나라에게 항복하고, 강동 6주를 포기하면서 송나라는 고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송나라는 고려에게 실망하고, 요나라에게 위협을 느꼈습니다. 송나라는 요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다른 국가와의 외교를 강화했습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와 요나라, 송나라 등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고려의 국가적 위기와 요나라의 침략적 성격, 송나라의 외교적 곤란을 드러냈습니다. 이 전쟁은 고려의 국력과 영토를 크게 흔들었으나, 고려는 강감찬 등의 장수들의 항전과 요나라의 병참난 등으로 인해 결국 요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상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이 글이 당신에게 유용하고 흥미로운 정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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