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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전쟁사 - 고구려의 후예들이 남긴 영광과 슬픔

다수정보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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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전쟁사 - 고구려의 후예들이 남긴 영광과 슬픔 에 대해서 살펴 봅니다.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한반도에서 꽃피운 한국의 한 왕조입니다. 고려는 중국의 역대 왕조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고구려의 후예로서 북방민족과의 전쟁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거란이라는 강적과는 총 세 번의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고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입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 - 고구려의 후예들이 남긴 영광과 슬픔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 - 고구려의 후예들이 남긴 영광과 슬픔

 

거란이란 어떤 나라인가?

 

거란은 10세기 초부터 14세기 말까지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키웠던 북방민족입니다.

 

거란은 원래 흑강(黑溝)이라는 곳에 살던 부족이었는데, 907년에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발해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발해의 수도 상경(上京)을 점령하고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거란은 발해의 문화와 제도를 계승하면서,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예라고 주장했습니다. 거란은 936년에 후진(後晉)을 세우고 중국의 황제를 인정받았습니다.

 

거란은 후진의 후에 후한(後漢), 후조(後周), 북송(北宋) 등과 연합하거나 전쟁하면서 중원의 통치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거란은 1125년에 여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어땠나?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었습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발해의 유민들과 친분을 맺고, 발해의 멸망을 원통하게 여겼습니다. 942년에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交賓)을 요구했지만, 태조는 이를 거절했고, 훈요 10조(訓要十條)에서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규정했습니다.

 

이후 고려의 역대 왕들은 태조의 반거란 정책을 계승하면서,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란과 송의 대립을 이용했습니다. 또한 고려는 발해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거란에 대항하는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 서희의 외교 담판

 

거란은 고려와 송의 반거란 연합전선을 저지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993년에 거란의 소손녕(簫遜寧)이 80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고려에서는 항복하거나 땅을 양보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서희(徐熙)는 이에 반대하고, 소손녕과의 회담을 제안했습니다.

 

서희는 소손녕에게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적대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거란군을 철수시켰습니다. 또한 서희는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江東六州)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희의 외교 담판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거란의 2차 침입 - 강조의 정변과 개경 함락

 

거란은 고려가 서희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구에도 거절하자, 다시 고려를 침략하려고 했습니다.

 

1010년에 거란은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강조는 목종(穆宗)을 죽이고 현종(顯宗)을 왕위에 올린 후,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강조는 거란과 강화를 맺으려고 했지만, 거란은 이를 거절하고 고려를 공격했습니다. 거란군은 개경(開京)을 함락시키고, 현종을 포획하려고 했지만, 현종은 강조와 함께 나주(羅州)로 피난갔습니다.

 

거란은 고려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고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의 저항과 병참의 고갈로 인해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거란의 3차 침입 - 강감찬의 구주 대승전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큰 손해를 보았지만, 여전히 고려를 포복시키고자 했습니다.

 

1018년에 거란은 다시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이번에는 거란의 최고 군사장수인 운녕(雲寧)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강동 6주를 목표로 했습니다.

 

고려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을 통상사(通商使)로 임명하고, 거란과의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과의 회담에서 고려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거부하고, 거란군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운녕은 이에 분노하고, 강감찬을 죽이려고 했지만, 강감찬은 용감하게 탈출했습니다. 강감찬은 고려의 군사를 재편성하고, 거란군과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강감찬은 구주(龜州)에서 거란군을 맞이했고, 5천의 군사로 10만의 거란군을 대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주 대승전(龜州大勝戰)이라고 불리는 전투입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전진로를 차단하고, 고려의 활술과 화살로 거란군을 살상했습니다. 거란군은 대패를 당하고, 운녕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강감찬은 이 전투에서 고려의 영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평화 조약 - 천리장성의 건설

 

거란은 고려와의 전쟁에서 큰 손해를 보았지만, 여전히 고려를 포복시키고자 했습니다.

 

1019년에 거란은 다시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이번에는 거란의 황제인 성종(聖宗)이 직접 30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개경을 목표로 했습니다.

 

고려에서는 현종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고, 강조를 처형했습니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거란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거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고려의 영토를 더욱 요구했습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비롯한 장수들을 투입하고, 거란군을 격퇴했습니다. 거란은 고려의 저항에 굴복하고, 1019년에 고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고려는 거란의 친조를 하고, 강동 6주를 반환했습니다. 거란은 고려를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고구려의 후예로서의 자부심과 영광을 지켰습니다.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1029년에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았습니다. 또한 1033년부터 1044년까지 전국경선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천리장성은 고려의 국방력을 높이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천리장성은 고려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상으로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 - 고구려의 후예들이 남긴 영광과 슬픔 에 대해서 알아 봤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고려와 거란은 총 세 번의 전쟁을 벌였는데, 이는 고려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입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고구려의 후예로서의 자부심과 영광을 지켰습니다.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나성과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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