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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의 배경과 과정

다수정보 2024. 1. 25.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은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에 있습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일본과의 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근대적 개혁운동으로, 왕권 강화와 군사·행정·재정·교육·외교 등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갑오개혁은 일본의 개입과 보수적인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습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일본이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사건으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 정도 머물다가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과 과정

대한제국 선포의 배경과 과정

 

 

고종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는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미 ‘제국’을 칭하였듯이, 대한제국도 근대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활동하려는 의지를 황제국 선포로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농상공부 협판 권재형, 외부 협판 유기환, 전 군수 정교 등의 칭제(稱帝) 논리는 대부분 자주독립 국가에서 스스로 존호(尊號)할 수 있고, 존호를 통해 국가의 위신을 높여 자강(自强)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럽 제국과 평등한 외교를 펼치는 데는 동양사회에서만 통하는 ‘제(帝)’와 ‘왕(王)’의 구별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주장, 만국공법에 의하면 자주국은 스스로 존호할 수 있고 타국이 그것을 승인할 권리는 없다는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도 등장했습니다.

 

김재현 등 716명의 연명 상소에서는 우리나라가 삼한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가 4,000리이고 인구도 2000만에 달하니 큰 나라라는 점을 강조했고, 의정부 의정 심순택과 궁내부(宮內府) 특진관 조병세 등 백관의 연명 상소, 지방의 유학(幼學), 성균관 유생, 시전 상인들의 상소가 이어졌습니다.

 

최익현, 유인석 등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들의 반대를 제외하면, 칭제를 통해 ‘자주’와 ‘자강’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가 대한제국 출범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황제국 선포에 앞서 8월 14일, 새 연호가 ‘광무(光武)’로 제정되었고, 8월 16일부터 사용되었습니다.

 

10월 11일에는 새 국호가 ‘대한(大韓)’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대한’이라는 국호가 선택된 이유로 고종은 삼한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것,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미 ‘한(韓)’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들었고, 의정 심순택은 ‘조선’은 옛날에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받은 국호이므로 당당한 황제국이 그 호칭을 계승함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오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 독립,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의 지향이 새 국호에 담긴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월 12일 새벽, 옛 남별궁 터, 즉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자리에 쌓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10월 13일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출범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과 추진세력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과 추진세력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대체로 황제와 그의 측근 세력, 새로 부상한 개혁파 관료들, 군사·재정·교육 등의 외국 고문들이 주도하였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갑오개혁에서 이어진 것으로, 군사·행정·재정·교육·외교 등의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사 분야에서는 1898년 군사교관으로 러시아인 알렉세이프 카페토프를 초빙하고, 1900년에는 군사교관으로 미국인 윌리엄 딘을 초빙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군사교육기관인 육군병사학교와 육군장교학교를 설립하였다. 행정 분야에서는 1899년에 법규교정소를 설치하여 법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00년에는 행정부서를 개편하여 8부 1청 1소로 구성하였다.

 

재정 분야에서는 1898년에 재정고문으로 미국인 존 맥레비를 초빙하였다. 1902년에는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여 양화를 폐지하고 원화를 발행하였다. 교육 분야에서는 1899년에 교육고문으로 미국인 호레이스 알렌을 초빙하였다.

 

1900년에는 교육부를 설치하고, 1901년에는 교육령을 제정하였다. 또한 1899년에는 국립대학인 경성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외교 분야에서는 1899년에 대한국국제를 제정하여 국가의 정치체제와 외교권을 명시하였다.

 

1900년에는 대한국국제 반포를 계기로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또한 1901년에는 국제법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외교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정책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은 근대 국제사회에서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중국과의 사대외교를 종식시키고,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또한 국제법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국제회의에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은 1899년 8월 17일에 대한국국제 반포를 계기로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덴마크, 스웨덴-노르웨이,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 페루,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쿠바, 하와이, 시암,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등과 수교하였다.

 

대한제국은 국제법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1901년에 외교부를 설치하였다. 외교부는 외교관계의 수립과 유지, 외교문서의 작성과 보관, 외교사절의 파견과 접수, 외교사건의 처리, 외교예산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외교부는 외교관계의 수립과 유지를 위해 외교관을 파견하였다. 대한제국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시암,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 등에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은 국제회의에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은 1900년에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참가하였다. 이때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 반포를 계기로 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였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대한제국의 문화와 산업을 선보이는 기회가 되었다.

 

대한제국은 1907년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국제평화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때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인해 박탈된 외교권을 회복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특사는 일본의 압력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과 대한제국의 종말

일제의 국권 침탈과 대한제국의 종말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대리로 삼았다. 1910년에는 한일병합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대한제국은 13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일제의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한제국의 문화와 예술

 

대한제국은 근대화 정책과 외교정책을 추진하면서,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다.

 

대한제국의 문화와 예술은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자주와 타주의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특징을 보였다. 대한제국의 문화와 예술은 다음과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 문학: 대한제국의 문학은 근대적인 언어와 형식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장르와 표현을 개발하였다. 대한제국의 문학은 한글과 한문, 그리고 영어와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되었다. 대한제국의 문학은 국민의 교육과 국권 수호, 근대화와 문명 개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대한제국의 문학은 신문과 잡지, 책과 전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대한제국의 문학은 소설과 시, 희곡과 비평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였다. 대한제국의 문학에는 이화, 이인직,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안중근, 박은식, 김동인, 나운, 이상 등의 작가들이 활동하였다.

 

  • 미술: 대한제국의 미술은 서양화와 동양화, 그리고 혼합화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하였다. 대한제국의 미술은 근대적인 장비와 기법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소재와 표현을 탐구하였다. 대한제국의 미술은 국화와 국권, 근대화와 문명 개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대한제국의 미술은 전시회와 잡지, 책과 전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대한제국의 미술에는 고백화, 고정화, 고영화, 고창석, 고준, 김은호, 김홍도, 박노수, 서영, 윤보선, 이중섭, 정선, 조석진, 최석정, 홍예석 등의 화가들이 활동하였다.

 

  • 음악: 대한제국의 음악은 서양음악과 동양음악, 그리고 혼합음악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하였다. 대한제국의 음악은 근대적인 악기와 악보를 도입하면서, 새로운 장르와 표현을 개발하였다. 대한제국의 음악은 국가와 국권, 근대화와 문명 개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대한제국의 음악은 연주회와 녹음, 책과 전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대한제국의 음악에는 가곡과 교향곡, 오페라와 민요, 군가와 학가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였다. 대한제국의 음악에는 안익태, 이난영, 이동진, 이상열, 이응노, 이태조, 장사익, 정재하, 조익상, 최남훈, 홍난파, 황병기 등의 작곡가와 연주가들이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의 역사와 의미

대한제국은 13년간의 짧은 역사를 가진 국가이지만,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국가이다.

 

대한제국은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 독립국으로서 근대 주권 국가를 지향하면서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했다. 대한제국은 근대화 정책과 외교정책을 통해 자신의 국가성과 문화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 통치에 맞서지 못하였지만, 국민들의 국권 수호와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한국 근대사의 전환점이자, 한국 근대화의 시도이자, 한국 독립운동의 기틀이다. 대한제국은 한국 근대사의 아픔과 영광을 함께 담고 있는 국가이다.

 

이상으로 대한제국에 대해 소개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은 한국 근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외교, 국제적 위치와 의미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국가입니다.

 

대한제국의 역사와 문화, 정책과 성과, 문제와 과제 등을 알아보면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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