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698년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주와 북한에서 세운 국가
이번에는 발해: 698년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주와 북한에서 세운 국가 를 주제로 살펴 봅니다.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주와 북한에서 세운 국가로, 698년부터 926년까지 존속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고, 당, 신라, 일본과 외교를 수립하며,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발해는 다민족 국가로, 고구려인, 말갈인, 거란인 등이 함께 살았으며,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를 수용했습니다.
발해는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과 정보가 매우 적어서 아직도 베일에 싸인 면이 많은 국가이며, 오늘날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국가입니다.
이 블로그 게시물에서는 발해의 역사, 문화, 정치, 외교, 사회, 종교 등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발해: 698년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주와 북한에서 세운 국가
발해의 건국과 국호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의 멸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668년,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고구려의 유민들을 강제로 당의 영주 (營州)로 이주시켰습니다. 영주는 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곳이었으므로, 고구려 유민들은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696년 5월, 거란족 추장 이진충 (李盡忠)과 손만영 (孫萬榮)이 영주도독 (營州都督) 조홰 (趙翽)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봉기하였습니다. 이진충은 스스로를 가한 (可汗)이라 불렀습니다. 당은 즉시 장군들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들은 영주를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 (乞乞仲象)과 그의 아들 대조영 (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들은 당군과 여러 번 교전하면서 천문령 (天門嶺)을 넘었고, 동모산 (東牟山)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 (敦化縣) 부근의 성산자산성 (城山子山城)으로, 영주로부터 약 2,000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698년, 대조영은 이곳에서 진국 (振國)을 건국하고, 스스로를 진국왕 (振國王)이라 불렀습니다. 진국이라는 국호는 당이 걸걸중상에게 준 진국공 (震國公)이라는 호칭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됩니다. 진국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고, 당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713년, 당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渤海郡王)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발해를 당의 세계질서에 편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를 거절하고, 국호를 발해 (渤海)로 변경하였습니다. 발해라는 국호는 바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발해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고, 천손 (天孫)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등, 자신의 국가성을 강조했습니다. 발해는 또한 신라와 일본과도 외교를 수립하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발해의 건국과 국호는 고구려의 계승과 독립을 표현한 것으로, 발해의 역사와 정체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발해의 정치체제와 행정구역
발해의 정치체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적인 군주국가였습니다.
발해의 왕은 천손이라고 불렸으며, 왕위는 대조영의 후손들이 세습했습니다. 발해의 왕은 국내외의 정치, 군사, 외교, 종교 등의 모든 사안을 결정하고, 관리들을 임명하고, 법령과 명령을 내렸습니다. 발해의 왕은 또한 불교를 국교로 삼고, 불사를 건립하고, 승려들을 보호하고, 불교의식에 참여했습니다. 발해의 왕은 이렇게 국가의 최고 권력자이자, 불교의 수호자였습니다.
발해의 행정구역은 5부 15주로 구성되었습니다.
5부는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각각 동부부 (東部府), 서부부 (西部府), 남부부 (南部府), 북부부 (北部府), 중부부 (中部府)라고 불렸습니다.
15주는 각 부에 속한 지역들로, 각각 동모주 (東牟州), 상경주 (上京州), 하경주 (下京州), 안시주 (安市州), 영주주 (營州州), 영천주 (營川州), 영흥주 (營興州), 영화주 (營和州), 영안주 (營安州), 영평주 (營平州), 영양주 (營陽州), 영서주 (營西州), 영남주 (營南州), 영동주 (營東州), 영중주 (營中州)라고 불렸습니다.
각 주는 또한 여러 개의 현 (縣)으로 나뉘었습니다. 발해의 행정구역은 고구려의 행정구역을 계승하고, 당의 행정구역을 차용한 것으로, 발해의 영토의 규모와 성격을 반영한 것입니다.
발해의 외교관계와 국제적 위치
발해의 외교관계는 당, 신라, 일본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발해는 당과의 관계에서는 동맹과 적대의 양면성을 보였습니다. 발해는 당의 칭호와 연호를 받아들이고, 사신을 주고받고, 교역을 하면서, 당의 세계질서에 순응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당의 영향력을 거부하고, 자신의 국가성을 강조하면서, 당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또한 당의 내란과 쇠퇴를 이용하여, 당의 옛 땅을 점령하고, 당의 적들과 연합하면서, 당의 위협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발해는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우호와 협력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발해는 신라와 공동의 적이었던 당에 대항하고, 공동의 문화였던 불교를 공유하면서, 신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발해는 신라에게 자신의 국호와 칭호를 알리고, 사신과 선물을 주고받고, 교역과 교류를 하면서, 신라와 동맹을 이루었습니다.
발해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교류와 갈등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발해는 일본과 문화와 종교를 교류하고, 사신과 선물을 주고받고, 교역과 교류를 하면서,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일본과 영토와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고, 일본의 침략과 간섭에 대항하면서, 일본과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발해는 이렇게 당, 신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과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발해의 사회와 문화
발해의 사회와 문화는 다민족과 다종교의 특성을 가졌습니다.
발해의 사회는 고구려인, 말갈인, 거란인 등의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고, 혼혈하고, 협력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발해의 문화는 불교, 도교, 샤머니즘 등의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영향을 주고받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발해의 사회와 문화는 고구려의 유산과 당의 문화를 계승하고, 신라와 일본의 문화를 수용하고, 말갈과 거란의 문화를 통합하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발해의 사회는 계급제와 직업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발해의 계급은 왕족, 귀족, 신하, 노비로 나뉘었습니다. 왕족은 대조영의 후손들로, 왕위를 세습하고, 국가의 최고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귀족은 고구려의 유명한 성씨들로, 왕족과 혈연관계를 맺고,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신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 거란인 등으로, 국가의 다양한 부서와 기관에서 일했습니다.
노비는 전쟁 포로나 범죄자, 빚쟁이 등으로, 왕족이나 귀족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발해의 직업은 농사, 목축, 어업, 장인, 상인, 군인, 관리, 승려 등으로 나뉘었습니다. 발해의 사회는 계급과 직업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다르게 정해졌습니다.
발해의 문화는 불교를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발해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왕과 귀족들이 불교를 후원하고, 불교의식에 참여했습니다. 발해는 또한 많은 불사와 불상, 불경, 불화 등을 건립하고, 보존하고, 제작했습니다. 발해의 불교는 고구려의 불교와 당의 불교를 계승하고, 신라와 일본의 불교와 교류하면서, 독자적인 특징을 가졌습니다.
발해의 불교는 또한 도교와 샤머니즘과 조화를 이루면서, 발해의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발해의 종말과 후예
발해의 종말은 거란족의 침략과 내란에 의해 초래되었습니다.
926년, 거란족의 왕 후부가 발해에 대대적인 침공을 벌였습니다. 발해는 거란족의 공격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수도 상경 (上京)이 함락되었습니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왕 (大王)은 거란족에게 사로잡혀, 거란족의 수도 흑룡강 (黑龍江)으로 끌려갔습니다. 발해는 이렇게 229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멸망하였습니다.
발해의 후예는 발해의 유민들과 관련된 민족들로,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발해의 유민들은 거란족의 침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거란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북한, 만주, 시베리아, 몽골, 중국 등의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발해의 후예로 가장 유력한 민족은 조선족 (朝鮮族)입니다. 조선족은 중국 동북부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한 지부로,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 주로 이루었다고 합니다. 조선족은 한국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한국과 밀접한 문화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해의 후예로 다른 민족들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주족 (滿族), 몽골족 (蒙古族), 진족 (金族), 우즈베크족 (烏茲別克族), 카자흐족 (哈薩克族), 키르기스족 (吉爾吉斯族) 등이 있습니다. 발해의 후예는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문제로,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발해: 698년 고구려의 유민들이 만주와 북한에서 세운 국가 를 주제로 한 블로그 게시물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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