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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협회

다수정보 2024. 1. 26.

대한독립협회는 1896년에 설립된 국민운동 단체로,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권, 민중의 정치참여, 내정개혁 등을 주장하고 활동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대한독립협회의 설립 배경, 활동 과정, 주요 활동, 평가와 비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대한독립협회

 

대한독립협회의 설립 배경

 

대한독립협회는 의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로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일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습니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데 동기가 있었지만, 국가 독립의 상징인 국왕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손상시켰을 뿐 아니라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초래하였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자주권 회복, 정치적 혼란 수습, 국민 통합이 당면 과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국간섭 이후 왕실과의 관련 하에 반일적 입장을 취하던 정동파를 중심으로 한 내각은 정부 시책을 국민에게 알릴 수단으로 민간지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서재필의 독립신문의 창간과 그 배포를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이어서 독립협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당초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를 표방하였습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손상된 군주 및 왕실 권위를 회복하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독립문을 세워 세계 만국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보여주려는 독립협회의 창립을 허가하였습니다.

 

대한독립협회의 활동 과정

 

대한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외부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날 전문 21조의 독립협회 규칙을 심의‧제정하여 공포하고 임원을 선출하였습니다. 이때 선출된 임원진은 고문에 서재필, 회장 겸 회계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 현흥택, 이상재 등 8명, 간사원에는 송헌빈, 남궁억 등 1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시범적으로 도합 510원을 헌납하였습니다.

 

1896년 10월 19일에는 다시 한번 간사원과 위원을 확충시켰습니다.

 

창립 초기 임원진은 서재필 외 이완용, 민상호, 이채연, 현흥택, 이상재 등 정동파라고도 불렸던 친미파 인사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한편 이들과 더불어 갑오개혁에 참여하였던 세력 중 아관파천 후에도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았고 일본과의 연관성을 유지하였던 자들로서 안경수, 김가진, 김종한, 권재형 등이 결합하였습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아관파천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한편 독립협회 내에 정부 내 고위 관료들이 대부분 가담하고 다양한 정파가 혼재하게 되자, 독립협회가 관료들의 사교 모임으로 변질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서재필, 윤치호는 토론회 개최를 발의하고 결정하는 동시에 집행부 권한을 강화하는 직제 개편을 추진하였습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를 강의실, 독서실, 박물관을 갖춘 계몽단체로 변모시킬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 결과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의 정기 집회는 토론회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이전의 위원장‧위원제가 폐지되고 대신 회장‧부회장‧서기‧회계‧사서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때의 임원진을 살펴보면 회장은 안경수, 부회장은 이윤용, 서기에 윤치호, 이상재, 회계 권재형, 이근영, 사서 이채연, 부사서 이계필, 이종하 등이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76명의 회원이 참가하면서 시작되어 매주 독립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대한독립협회의 주요 활동

대한독립협회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독립문 건립: 1896년 11월 21일, 독립협회는 고종의 승인을 받아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1897년 2월 22일, 고종은 대한제국으로 개호하였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3일, 독립문은 완공되었고, 1898년 1월 1일, 독립문 개축식이 열렸습니다. 독립문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로, 국가의 자주권과 국민의 자유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 독립신문 발행: 1896년 4월 7일, 독립협회의 고문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여 발행하였으며, 국내 최초의 일간지였습니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주장과 활동을 알리는 수단이 되었으며, 국민의 교육과 계몽, 국가의 독립과 개혁, 민권과 민주주의 등을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1월 30일까지 총 258호를 발행하였습니다.
  • 독립공원 조성: 1897년 4월 15일, 독립협회는 독립문의 남쪽에 독립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독립공원은 독립문과 함께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국민의 휴식과 오락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독립공원은 1898년 3월 1일에 완공되었으며, 독립관, 독립기념관, 독립탑, 독립사, 독립무덤, 독립동상 등이 있었습니다. 독립공원은 1911년 일제의 파괴로 인해 소실되었습니다.
  • 독립운동 참여: 1898년 12월 27일, 독립협회는 고종의 개혁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이 청원서는 독립협회의 토론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국왕의 권위 회복, 정부의 내정개혁, 국민의 민권보장, 외국의 간섭방지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청원서는 고종에게 전달되었으나, 정부의 반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독립협회는 을사늑약 반대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시위는 서울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국민의 분노와 저항의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이 시위는 일제의 진압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나, 독립협회의 운동 정신은 후대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한독립협회의 평가와 비판

 

대한독립협회는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단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민권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국민의 정치참여와 계몽을 촉진하였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또한 독립문, 독립신문, 독립공원 등을 통해 국민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고취시켰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근대적인 시민사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독립협회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주로 양반 계층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하층민의 의견과 요구를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또한 외세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으며, 일부 임원들은 일본과의 협력을 추구하였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또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며, 정부의 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한독립협회는 결국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해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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