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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성립과 멸망

다수정보 2024. 1. 28.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을 위해 고려의 역사에 대해 살펴 봅니다.

 

고려는 통일 신라의 후기에 태조 왕건이 건국한 국가로,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 한반도와 동북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며, 불교를 국교로 삼고, 세계적인 문화와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장영실이 천문학과 과학기술을 발전시킨 것은 인류 역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려의 성립과 멸망

고려의 성립과 멸망

 

  •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 고려 초기의 왕권 강화와 문화 발전
  •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과 민란
  • 고려 말기의 원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고려는 918년에 왕건이 태봉의 군주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여 건국하였습니다.

 

왕건은 신라의 진골 왕족 출신이었으며, 송악(개성)의 토호로서 궁예의 장수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궁예가 폭정을 휘두르자, 왕건은 궁예를 반역자로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고구려의 영토와 문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고려의 국호는 영어로 코리아(Korea)라고 표기되는데, 이는 고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신라와 후백제와의 통일을 추진하였습니다.

 

935년에는 신라를 복속시키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정복하였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한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습니다. 또한 926년에는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발해의 유민들을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고려의 세력을 확장하고,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강화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의 왕권 강화와 문화 발전

 

고려 초기에는 왕권이 약하고, 지방의 토호들이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종 때부터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노비안검법을 통해 노비를 해방시키고, 과거제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습니다.

 

또한 칭제를 통해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의 정치와 사회를 안정화하고, 왕권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에는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불교 문화와 예술이 번영하였습니다. 고려의 불상과 불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등회가 열렸습니다.

 

고려는 또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습니다. 훈민정음은 한글의 원래 이름으로, 한민족의 고유한 문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뛰어난 문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교육을 위해 만든 것으로, 한글날에는 세종대왕의 공덕을 기리는 행사가 열립니다.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과 민란

 

고려 중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여러 위기가 겹쳐왔습니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는 요나라의 거란족이 고려에게 여러 번 침략을 시도하였습니다. 고려는 강감찬과 윤관 등의 장수들이 맞서 싸워 거란군을 물리쳤지만, 국력은 크게 소모되었습니다.

 

또한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1170년에 무신정변으로 이어졌습니다. 무신정변은 군인 출신의 최충헌이 왕족과 문벌 귀족을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이후 최우, 최항, 최의 등의 최씨 무신들이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를 무신정권이라고 합니다.

 

무신정권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통치 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무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다투고, 백성들을 착취하였습니다. 또한 무신들은 자신들의 영토와 권력을 자손들에게 상속하였습니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 병자호란은 무신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병자(兵子)라고 부르고, 호(戶)라는 단위로 관리하였다는 뜻입니다.

고려청자

고려 말기의 원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과 민란은 고려의 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를 이용하여 13세기에는 몽골의 원나라가 고려에게 여러 번 침략을 시도하였습니다. 고려는 강화도 전투와 삼척 전투 등에서 원군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1259년에 원에게 복속하였습니다.

 

이후 고려는 원의 종속국이 되었으며, 원의 명령에 따라 몽골 전쟁에 참여하거나, 공물을 바치거나, 원의 왕자를 세습왕으로 삼는 등의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원의 간섭은 고려의 국민들에게 큰 불만과 저항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의 국운을 일으키려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공민왕입니다. 공민왕은 1351년에 왕위에 오르고, 원의 영향력을 저지하고, 고려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 정치적으로는 무신정권을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문벌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과거제를 활성화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상업을 장려하고, 화폐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노비안검법을 재시행하여 노비를 해방시켰습니다.
  • 군사적으로는 병자호란을 폐지하고, 새로운 군사 조직인 의병을 조직하였습니다. 의병은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민병으로, 원군과 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 문화적으로는 훈민정음을 재발행하고, 고려사를 편찬하였습니다. 또한 과학기술과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장영실이 천문시계인 자격루와 비도청을 발명하였습니다.

 

공민왕의 개혁은 고려의 국력을 회복시키고, 원의 종속에서 벗어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1368년에는 원이 몽고로 퇴각하고, 중국에는 민족 국가인 민나라가 건국되었습니다. 공민왕은 민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1374년에는 민나라의 황제가 공민왕에게 명나라의 국호를 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는 고려가 원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였습니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고려는 공민왕의 개혁으로 원의 종속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운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의 침략이었습니다.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에는 일본의 당시 정권인 무라카미가 고려에게 여러 번 침략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를 왜란이라고 합니다. 왜란은 고려의 해안 지방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등의 잔혹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고려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군사적 약화로 인해 왜란을 완전히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의 정치권력은 점차 붕괴되었습니다.

 

공민왕의 후손들은 왕권이 약화되고, 측근 세력과 문벌 귀족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고려의 국내에는 민나라와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고려의 국가 자주성을 위협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려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이성계입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문신 출신으로, 의병을 이끌고 왜란을 물리치고, 민나라와 원나라의 간섭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개혁을 위해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포기하지 않고, 1392년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고종을 퇴위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를 조선이라고 합니다.

 

조선은 고려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고려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왕권을 강화하고, 문벌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양반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또한 훈민정음을 국문으로 삼고,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아 교육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상으로 고려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고려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국가로, 세계적인 문화와 과학의 발전을 이룬 국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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